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징옥의 난 (문단 편집) == 이후 == 이후 [[연좌제]]로 그의 장남 이자원(滋源)과 차남 이윤원(潤源)은 처형 또는 이징옥과 함께 살해되었고, 딸은 [[노비]]로 분배되었다. 당시 8세였던 셋째 아들 이연원(淵源)은 [[유모]]가 구출하여 은신, [[경상북도]] [[경주시|경주]] [[토함산]] 서편 아래 상신곡에 숨어들어, 은거하여 본관을 초계라 칭하고 세계를 이어갔다가(경주시 외동읍 신계리), 그의 후손들은 [[순조]](純祖)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. 이징옥의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는 이징옥과 달리 계유정난에 가담했기에 [[공신]]에 책봉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형식적이었을 뿐 전부터 이징옥과 사이가 안좋았고 적극적으로 난을 토벌하기도 하여서 세조가 그들을 연좌하지 않았기에 석방되어 무탈하게 지내게 된다. [[계룡산]]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고, [[강원도]] [[영월군]] [[장릉(영월)|장릉]]의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. 1698년([[조선 숙종|숙종]] 24) 《장릉지(莊陵誌)》에 신원상소(伸寃上疏)가 올려졌으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1791년([[정조(조선)|정조]] 15년)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(忠剛)의 시호가 내려졌다. 이어 장릉배식단(莊陵配食壇)에 배향되었다. 그러나 정조 사후 [[노론]]이 집권한 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. 1908년([[융희]] 2년) 4월 30일에야 [[내각총리대신]] [[이완용]](...)의 건의로 복권되었다. 당시 이완용은 과거의 인물들의 신원을 회복하고 시호를 붙여주는 명예회복 사업을 활발하게 시행했는데 이징옥도 여기에 포함된 것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